사진= 정선군, 동학군 녹도전투 현장에 ‘정선 동학농민군 역사비’ 세운다

[디스커버리뉴스=정기환 기자] 정선군농민회와 정선 평화의 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가 1894년 정선 동학농민군이 일본군 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정선 녹도에 ‘정선 동학농민군 역사비’를 건립한다.

역사비 제막식은 25일 오전 11시 정선읍 녹송정 앞에서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예방수칙 준수 등 최소한의 인원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다.

제막식 행사를 주관하는 정선군농민회 김영돈 회장은 “정선 녹도는 1894년 11월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외쳤던 정선 동학농민군이 꽃잎처럼 스러져간 역사적인 장소에 정선 농민 지도자 지왈길 장군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그날을 맞아 통한의 역사를 증거하는 역사비를 세우게 됐다며 126년이나 지난 일이라 늦은 감은 있지만 동학정신이 추구했던 역사 인식을 새롭게 하는 정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선이 동학과 관련이 깊은 것은 1871년 영해에서 일어난 이필제의 난 이래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생은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부터이다.

그때 최시형은 정선 남면 무은담에 있는 유시헌 접주 집에 숨어들었고 그때부터 정선은 동학의 고장이 됐다.

이후 20년 넘는 세월 비밀 포교에 나선 최시형은 동학의 교세를 확장했고 그중 정선의 교도 수는 타지역보다 월등했다.

1894년이 되자 고부군수 조병갑이 학정을 일삼자 남접 농민들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앞장섰다.

그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인데, 삽시간에 번진 불길은 충청을 지나 정선 땅까지 번졌다.

정선은 제천·영월·평창 등 인근 지역과 연합해 9월 7일 강릉 관아를 접수한 수 집장소를 차렸다.

하지만 선교장 주인 이희원이 이끄는 민보단의 기습을 받고 다시 대관령을 넘었다.

그해 10월 20일 경 재정비를 마친 동학농민군 3천여명이 정선 녹도에 집결하자 정선군수는 도주했다.

이에 분노한 농민군들은 이방의 머리를 베고 강릉 관아를 재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농민군이 강릉을 목표로 한다는 정보가 있자 민보단을 이끈 공으로 강릉부사가 된 선교장 이희원이 10월 22일 전 중군 이진석이 이끄는 관군과 민보군을 정선과 평창으로 급파했고 11월 1일에는 강원감영에서 감영 중군과 관군을 내려보냈으며 11월 3일에는 감영토포사가 인솔하는 관군과 이시모리 대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2개 중대가 평창 운교참에 도착했다.

이들은 11월 5일 평창 후평리의 농민군을 진압한 다음 곧장 정선으로 향했다.

11월 6일 강릉 민보군 중군 이진석이 이끄는 부대는 여량으로 쳐들어가 10여명을 죽이고 접사 이중집 등 5명을 체포해 이 가운데 이중집·임순철·김윤언 등 3명은 강릉으로 압송됐다가, 11월 22일 강릉여중 자리에서 포살됐다.

이시모리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감영군은 그 시간 정선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전투는 정선 녹도에서 벌어졌으며 치열했다.

그날 ‘정선 동학농민군 녹도 전투’로 인해 많은 수의 농민군이 전사했고 체포된 농민군은 녹도 둔치의 소나무 숲에서 전원 처형됐다.

정선 지역의 농민군을 이끌었던 지도자 지왈길은 1894년 11월 23일 체포되어 11월 25일 녹도에서 효수됐고 이후 정선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급속히 위축됐다.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인근 지역으로 흩어져 활동했으나 최시형 선생께서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그해 6월 2일 교수형을 당하자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도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정선의 동학 관련 유적지는 정암사 적조암과 무은담, 1대 교주 최제우 선생 부인의 묘가 있던 화암면 싸내 마을 등이 있다.



<정기환 기자 jeong9200@sundo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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