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력과 의지만으로 성공을 만든 ‘제2의 정주영’이라 불리운다.

[디스커버리뉴스=정기환 기자] ‘입지전적’[立志傳的], 어려움을 이기고 뜻을 세워 노력하여 목적을 달성한 사람의 전기. 이 단어 한마디는 바로 이 사람을 가르키는 표현의 모두다.

두선그룹 정군영 명예회장,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를 보고 능력과 의지만으로 성공을 만든 ‘제2의 정주영’이라 부른다. 칠순(七旬)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쉼없이 앞만보고 달려온 그가 3년전 어느날 처음으로 멈춰 섰다. 세상을 잃었다. 정 회장의 아내(명기정)가 항암치료를 해오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평생 아내이자 친구이며 사업 파트너였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정 회장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그동안의 반성으로 모든 일을 멈췄다. 자식들과 주변의 만류도 소용이 없었다.

정 회장은 모든 것을 멈추고 아내가 투병 생활을 했던 경기도 여주 집에 머물며 아내와의 시간을 추억하고, 또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두선산업 정군영 명예회장은 그 옛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이 열네살에 집안 아저씨가 운영하던 박스공장에서 일을 배우기 위해 고향 홍성을 떠나 타지에서 박스를 접는 공원(공돌이)생활을 시작했다.

이른 나이에 공원 생활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기술을 배워 나의 사업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성실한 생활을 해오던 청년 정군영은 그와 같은 생활 속에서 같은 일을 하던 아내를 만나기에 이른다.

그때 청년 정군영의 나이 29세, 부인이 24세로 두사람이 만나 1984년 경기도 광명시 살림집에서 부인이 가정부업으로 일을 시작했다. 아내가 물량을 주문받아 밤새 작업해 놓으면 정 회장이 아침에 출근하면서 배달을 하고 저녁에 퇴근하면서 작업할 물량을 가져와 일을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은 5년만인 1989년 정 회장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사업자로 등록을 하고 회사를 만들었다. 회사대표는 아내이름으로 했다.

이때 창업한 두선산업은 2000년 법인으로 전환하고 2006년 안산시 공장을 매입하면서 전환기를 맞게 된다.

또한 두선산업은 지난 2013년 ‘두선베트남 해외법인’을 설립했다. 정군영 회장의 베트남 진출은 말 그대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정 회장은 무작정 베트남으로 달려가 공장 지을 땅 5000 평을 임대했다.

공장 지을 땅을 임대한 정 회장은 무턱대고 베트남 삼성을 찾아갔다. 무작정 찾아오는 정 회장을 반겨줄리 없는 삼성의 문을 계속 두드렸다. 결국 현지 삼성의 상무가 정 회장의 무지하지만 적극적인 열정을 보고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렇게 정 회장은 삼성에 인맥도 경험도 없이 무턱대고 들어가 국내에서 인정받은 두선산업의 박스기술을 어필하고 설득했다.

그의 노력에 베트남의 삼성도 “조금이라도 우리가 정한 규격과 제품의 품질이 못 미칠 경우 거래는 끝이다” 라며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해도 정 회장은 “모든 것을 맞출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결국 삼성의 1차 납품업체로 선정됐다. 현재 베트남 공장은 10만 여평에 1000여 명의 현지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다.

두선산업(주)의 베트남 공장은 삼성전자 스마트폰 패키징의 제1차 벤더사로서 삼성의 우수한 규격에 부응하는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완벽한 원스톱 자체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불량률 0%를 목표로 고품질 제품을 제공하고 있다.

정군영 회장은 “현재 삼성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기술 발전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으며 삼성이 요구하는 엄격한 기준을 100% 충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두선산업 공장을 현지인들은 ‘두선왕국’으로 부를 정도로 자리를 잡았지만, 베트남 공장을 시작하려 했을 때 아내가 말리고 반대했음에도 정 회장은 베트남 사업을 밀어붙이고 정진하면서 아픈 아내를 오롯이 돌보지 못한 미안함을 평생 간직하고 가져가야겠다는 마음이다.

‘제2의 정주영’ 또는 ‘리틀 정주영’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우는 정 회장은 많이 배우지 못하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 없이 맨손으로 오늘날 1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기업을 일궈냈다.

두선산업(주)은 서울 금천구 가산디지털로에 위치한 제1공장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의 제2공장 및 베트남 공장 등 3개축으로 해서 뛰어난 기술 및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발전을 가속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 공장에는 우수한 국내 원자재의 공급 및 기술진의 파견으로 한국과 베트남간 비즈니스 및 우호를 확대하고 있다. 현재는 정군영 회장의 장남 정우혁 대표가 베트남 법인을 총괄하고 있다.

또한 두선산업(주)는 제1공장 부지에 두선코스메틱을 설립해 화장품 산업을 육성하고 있으며 제2 공장에서는 토탈 패키징 시스템을 통한 고품질 제품의 공급을 하고 있다. 제1 공장이 위치한 가산동 부지는 약 1700여평의 부지로 베트남 시장을 겨냥한 화장품의 연구 및 기술 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정 회장은 직원들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다르다. 그는 항상 “회사는 가족의 행복을 주는 근원이다. 자가용 옆자리에 아내를 태우고 뒷자리에는 자녀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며 즐길 수 있도록 회사가 만들어 주는 것이다”고 항상 말한다. 정 회장의 경영철학은 ‘직원 모두가 행복한 회사’다. 정 회장의 직원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빛이 난다. 감자, 쌀, 옥수수 등 계절마다 제철 농산물을 직원들에게 선물한다. 정군영 회장은 “정주영 회장에게 배운 직원에 대한 배려”라고 말한다.

직원들에게 늘 다정한 정 회장은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깐깐하다. 두선산업 정상혁 대표는 “회장님은 직원들을 가족같이 아까고 사랑하신다. 그러나 일과 관련 잘못을 하면 가차 없이 지적하고 혼을 내신다”며 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소개했다.

그렇게 회사와 직원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쏟던 정 회장이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두선산업(주)은 조카인 정상혁 대표에게, 두선산업 베트남 법인은 아들인 정우엽 대표, 또, 두선코스메틱은 큰딸 정청옥 대표이사에게 물려주고 정 회장은 매주 수요일 안산공장으로 출근한다. 출근하면 회의에도 참석하고 특히 공장라인에 들어가 직원들과 함께 박스를 접는다.

정 회장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아내의 이름으로 ‘명기정장학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부모가 있다는 이유로 정부와 제도권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를 소개받아 이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는 아내가 살아생전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 행했던 베품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정 회장은 “아내는 살아생전에 아이를 좋아하고 주변의 어려운 애들이 있으면 조건 없이 도와줬다. 특히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안고, 무릎에 앉히고 달래주며 장애아 사랑이 남달랐다”고 말했다.

현재 ‘명기정 장학재단’의 이사장은 정 회장이지만 엄마(명기정)의 품성을 가장 많이 닮은 큰 딸인 두선코스매틱 정청옥 대표가 이사장직을 이양할 계획이다. 실질적인 장학회 운영도 정청옥 대표가 하고 있다.

모든 것을 물려주고 자리에서 물러난 정군영 회장은 아내가 아프면서 요양을 위해 마련한 여주의 시골집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치료 후 돌아오겠다던 아내는 재발 후 입원하면서 끝내 여주 시골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 회장은 아내와 함께 쓰던 방과 침대가 편하다며 아내와 함께 생활했던 환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살고 있다.

수령이 100년쯤 돼 보이는 느티나무가 있는 정 회장의 시골집 뒤뜰에는 온갖 식물과 나무들이 빼곡하다. 정 회장은 이곳에서 매일 아내와 대화 하듯이 시를 쓰며 아내를 그린다. 정 회장은 오늘도 시를 통해 아내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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